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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부도의 날'의 국제적 관점 진짜 버전 - 왜 한국은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나?

 

 

1997년 IMF외환위기가 온 배경을 국제시각으로 풀어 봄

 

 

1. 덩샤오핑이 중국 공산당 1인자가 되고나서 후계구도 결정방식을 정함 

2. 등샤우핑이 정한 중국 공산당 1인자 결정방식은 차기 뿐만 아니라 차차기 후계자까지를 미리 지정하여 권력 승계를 스무스하게 가져가는 것으로 '격대지정'이라고 부름 

3. 덩샤오핑은 이 기준에 따라 차기 후계자로 장쩌민을, 차차기 후계자로 후진타오를 지명함. 

4. 등샤오핑이 처음부터 차기 후계자로 장쩌민을 정한것은 아니었음 

5. 원래 후계자는 리핑 이었음 

 

6. 80년대말 중국 민중들에게 자유의 바람이 불어 학생시위가 커지면서, 마침내 천안문광장까지 시위대가 점령을 함.  

7. 피를 보는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판단한 중국 공산당은 인민해방군이 인민을 쏜 천안문사태를 주도 하였고, 리핑이 학살의 총대를 매고 책임졌다.

8. 천안문 학살로 시위사태는 진압했지만, 등샤오핑 등 집권부는 리핑이 천안문에서 피를 묻혀 개방개혁으로 외부로 나가기에 장애가 있다는 판단들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9. 북경에서 멀리 떨어진 상하이를 맡고 있어 천안문 피가 묻지 않았고, 중앙에 파벌이 없는 장쩌민을 얼굴마담격인 후계자로 세우고 리펑은 2인자격인 총리를 맡아 실권을 행사하는 구도로 차기 권력 구도 재편 

 

10. 이후 상하이시장을 했던 장쩌민이 국가 주석에 오름. 

11. 장쩌민은 북경에 연줄이 없어 상하이시장을 할때 같이 일하는 관료들을 불러 파벌을 만들게 되는 데, 이것이 바로 상하이방이라 불리는 조직이 되었다.

13. 이때 상하이방이 파벌로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는 성과가 필요했다.

14. 등샤오핑이  국가주석직을 물려줬지만 아직 힘이 짱짱했기에 상하이방은 등샤오핑의 경제정책을 실현하며 힘을 키우려고 함 

15. 이것이 바로 선부론 이었음 

16.  선부론, 먼저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부자가 되면, 그들이 뒤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도와서 결국 전체가 다 잘 살것이라는 등샤오핑의 이론이었음 

17. 이것은 자원을 선택적으로 집중하자는 말이었고, 이 이론에 따라 상하이 등 해안 도시들을 집중적으로 키우기 시작함.

18. 해안도시를 키우는 방법으로 수출 확대라는 방향성을 잡게 된다.

19. 하지만 당시 중국의 기술력은 좋은 편이 아니였기 때문에,  노동집약적인 상품 외에는 만들수 없었고, 이러한 상품군들은 이미 태국, 인도네시아등 동남아국가들과 가격 경쟁을 하고 있었음 

19. 이때 생각해낸 계획이 환율을 통한 가격경쟁력 확보였음.

 

20. 그리하여 1994년 1월 중국은 환율을 크게 움직이는데 (고정환율제)

21. 달러당 5.8위안을 8.8위안으로 한방에 바꿔린다.

22. 이말은 바로 중국 제품의 가격이 해외관점 (달러관점)에서는 40%이상 저렴해졌다는 이야기가 됨
(이전에는 1달러로 중국물품을 5.8위안 밖에 살 수 없었지만, 이제 8.8위안 어치 살 수있는 가치가 됨)

23. 중국은 수출이 증가하며 경상수지 흑자가 급속도로 늘어났지만, 당시 중국과 가격경쟁을 하던 다른 동남아 국가들은 수출이 줄어들면서 경상수지의 적자로 이어지면서 달러 공급이 줄어들어 달러가 마르기 시작함 

 

24. 이 당시 한국은 김영삼이 대통령이 됨 (1993년 임기 시작)

25. 김영삼은 문민정부가 군사독재 정부보다 경제적으로 뒤쳐지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음

26. 평생 진영논리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사람이라 경제도 정치방식으로 풀어대기 시작함 

27. 수많은 경제인들이 한국 금융시장에 문제가 있다는 경고를하면 구시대 군사정권 적폐 잔당 등의 정치적 공세라고 생각하고 묵살

28.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금융선진화라는 명목으로 지방에 영세한 24개 단자회사들을 종금사(종합금융사)로 전환함(1993년). 

29.  6개 종금사 체제에서 한 번에 24개 종금사가 추가되면서, 총 30개나 되는 종금사들의 경쟁이 치열해지게 되었고, 종금사들 또한 새로운 먹거리가 필요해짐

30. 이러한 민원에 김영삼 정부는 종금사들에게 외화대출 규제를 풀어줌

31.   외화대출의 규제가 풀리자, 당시 외환업무에 경험이 적었던 신설종금사들은 일본 자금 등의 해외 자금을 싼 이자로 빌려와 비싸게 빌려주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깨닿게 됨 (선진국은 개도국에 비해 금융시장에서 대출 이자가 싸다).

32. 즉, 일본 등에서 2%대의 이자로 외화를 빌려와, 기업들에게는 8%의 금리로 대출을 해주기만 해도 중간마진 6%를 종금사가 먹으니 땅짚고 헤엄치기식으로 한동안 떼돈을 벌기 시작함.

33. 그당시 시중금리가 10%를 훨씬 넘던 때라 8%대 금리는 기업 입장에서 저렴한 이자임.

 

34. 여기서 알아야 할 금융상식은, 같은 돈을 빌려와도 대출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싼 이자로 빌려올 수 있음 (하지만 대출이 연장이 안되거나 거절되면...). 

35. 이러한 점을 노려 당시 종금사들은 수익 구조를 더 높이기 위해, 외화대출의 기간을 1년짜리 단기로 빌려와서 만기가 되면 연장을 하는 방법을 씀.

36. 결국 당시 종금사들이 일본이나 미국 등 해외에서 빌려오는 돈의 70%이상이  만기 1년이내인 단기자금으로 운영.

37. 그러나 종금사들간에  경쟁이 심해지자 대출금리가 점점 떨어지면서 종금사들의 대출 이자 마진이 박해짐.

 

38.  이제 종금사들은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로 직접 진출하여 해외에서도 영업을 하기 시작함.

39.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대출을 해주기보다 직접 투자를 하며 돈 벌이에 나서게 됨. 

 

 

40.  이런 상황에서 앞서 이야기한 중국의 환율조작(급변)으로 동남아 국가들의 수출이 폭망하게되자 무역에서 경상수지적자가 시작되었고 동남아에는 달러가 마르기 시작함.

41.  경상수지 적자에 놀란 해외 자금들이 동남아 각국들을 앞다투어 빠져나가기 시작하였고, 수출이 안되고 외화가 부족한 동남아 기업들이 파산하기 시작함.

42. 동남아기업들이 파산하기 시작하자  동남아에 대출해준 한국 종금사들이 맛이가기 시작했고, 야마이찌증권 등 일본 금융기관들의 파산도 시작됨 

43. 일본 금융기관들이 맛이 가기 시작하자 일본 금융감독국에서는 자본을 늘리게 규제가 들어감. 

44. 일본 금융감독국은 은행 BIS비율(자기자본비율)이라는 제도를 도입해서 자본비율을 높이라고 지시하였고, 일본 금융기관들은 갑자기 자본을 늘릴수 없으니 대출을 회수하고 다시 빌려주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자본 비율을 맞추기 시작함 .

45. 기존 나가있는 대출이 만기가 도래하는대로 족족 회수하였는데, 특히 만기를 짧게 설정한 한국 종금사대출들이 이 회수의 주 타겟이 됨 

 

46. 한국 종금사들 입자에서는 빌려온 돈의 만기연장이 안되자, 한국 종금사들도 기업에 대출해 준 돈을 회수하기 시작함

47. 그당시 한국 대기업의 평균 부채비율이 519%수준으로 현금이 부족한 상황이라  갑작스런 대출회수에 기업들이 대출상환이 어려워지면서 무너지기 시작함

48. 동시에 한국에 들어온 해외자금이 상환받은 자금을 달러로 바꿔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달러가 마르기 시작했고, 얼마 안되는 달러로 환율을 방어하던 정부는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들고 IMF에 콜을 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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